이른바 지혜(智)라는 것은 미묘한 말이다. 미묘한 말은 지혜가 뛰어난 사람(上智)도 알기가 어렵다. 지금 뭇사람들을 위해 법을 제정하면서 지헤가 뛰어난 사람인 상지마저 알기 어렵게 만든다면, 백성이 그것을 따라 이해할 수 없다.[각주:1]


  • 2013년 5월



한비자의 교양강의

저자
가이즈카 시게키 지음
출판사
돌베개 | 2012-07-16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한비의 삶과 시대를 입체적으로 조명하다!『한비자 교양강의』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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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 고전을 다루는 교양강의 시리즈가 꽤 많이 출판되어 있다. 대부분 해당 분야의 저명한 학자가 강의형식으로 구성하였기에 초심자가 접근하기 좋고 재미도 있는데, 한비자(韓非子)를 읽기 전 도움을 받고자 읽기 시작했다.


<동양의 마키아벨리>로 언급되는 한비자는 마키아벨리보다 무려 1700여년전의 사람이니만큼 한비자로서는 자존심 상하는 칭호일지 모른다. 오히려 마키아벨리를 일컬어 <서양의 한비자>라고 해야 맞지 않을까. 그러나 그렇게 불리지 못한 것은 근대이후 서양 문화의 지배력이 동양을 압도한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우리가 <한비자>를 잘 모른다는데 있을 것이다.


한비자에 대해 알고 있는 내용은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통해 얻은 지식 정도이다. 법가(法家)의 사상가로 이사(李斯)와 함께 순자(荀卿)의 제자이며, 한비자의 재능을 시기한 이사와 요고(姚賈)의 참소에 죽음을 당하게 된다[각주:2]는 것이 흔히 알고 있는 내용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단편적인 지식은 한비자에 대해 더 큰 오해를 하게 만들고, 더 미지의 인물로 만들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한비자 교양강의』의 저자는 이러한 신비와 무지의 인물 한비자를 현실세계로 끌어냄으로써 우리에게 이해시키려고 한다.



한비(韓非)의 시대적 배경


한비(韓非)를 우리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저자는 먼저 한비 개인과 시대적 배경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한다. 첫째, 한비의 신분은 무엇인가. 둘째, 한비는 순자의 제자인가. 셋째, 정말로 이사가 한비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는가, 그리고 당시 그가 처한 시대적 상황-진(秦)나라가 어떻게 전국(戰國)을 통일해 가고 있는가-을 통해 그의 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한비가 순자의 제자가 아닐것이라는 추정은 먼저 『순자』에 이사와의 문답이 있는 반면, 한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것.[각주:3] 그리고 『한비자』에서도 한비의 시대보다  1세기 이상 앞선 신불해(申不害)는 자주 화제에 오르지만 순자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점[각주:4]과 순자의 후반생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지 못했다는 점[각주:5] 등으로 볼때 한비와 순자가 직접적인 접촉이 없으리라고 판단할 수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한비는 이사와 동문(同門)이 아니었다는 할 수 있는데, 그럼 왜 이사는 한비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을까. 저자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한비의 죽음은 이사가 아닌 한비 자신이 초래했다고 말한다.


진(秦)나라에 사신으로 간 한비의 목적은 한(韓)나라를 위기에서 구하는 것이었다. 당시 산동 네 나라의 연맹에 대해 진나라는 반격을 하고자 요고로 하여금 사국연맹 반대 운동을 추진케 하였는데, 한비는 이를 막기위해 요고의 스캔들을 터뜨렸다. 그러나 한비의 뜻과는 달리 요고와의 논쟁에서 지게 되고 결국 이것이 죽음에 이르게된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던 것이다.[각주:6]


전국시대 진(秦)을 제외한 육국(六國)은 이처럼 풍전등화의 상황에 처해있었다. 그 중에서 한(韓)나라는 강국 사이에 끼어 항상 압박을 받는 처지였고, 마치 진(秦)나라의 속국과 같은 나라로 전락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각주:7] 한비는 이러한 자신의 나라를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이상적인 정치 개혁안을 내놓았지만 결국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오히려 진(秦)나라가 한비의 사상을 받아들여 한(韓)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하게 된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그러나 그로인해 진(秦)나라도 결국 멸망을 피할 수 없던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한비의 사상(思想)의 변화


저자는 한비의 사상과 그 변화를 전반부(제3편 난언 ~ 제21편 유로) 19편, 중반부(제22편 세림 상 ~ 제35편 외저설 좌하) 14편, 후반부(제36편 난일 ~ 제55편 제분) 20편으로 나눠 설명하고 있다.[각주:8]


혹독한 법률만능주의로만 생각되는 한비의 초기는 황로(黃老) 또는 도가(道家)사상의 영향을 받았기에 "예를 강조하기보다는 소박한 심정에 호소해야 한다"[각주:9], "민중의 소박한 심정을 잊으면 혼란이 일어난다"[각주:10]라고 주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초기 저작들이 한비의 저작인지에 대해 용조조(容肇祖)[각주:11]와 양계웅(梁啓雄)[각주:12]은 의견을 달리한다. 저자는 1973년 장사(長沙)의 마왕퇴(馬王堆) 3호 한묘(漢墓)에서 나온 대량의 백서(거의 완전한 두 종류의 『노자』 초본(抄本))을 통해 이러한 의문에 한발 더 접근한다.


이처럼 황로사상에 강한 영향을 받았던 한비는 그 후 개인주의적 생활에서 벗어나 사회와 국가를 위해 활동하겠다는 결심을 다진다. 그리고 법률에 의한 통치를 주의(主義)로 삼는 법가 사상으로 전향하게 되는데 그 원인은 망국의 위기에 직면한 한(韓)나라의 현실적인 문제를 타개하기 위한 고민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새로운 정치학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를 고민하게 되었고, 국가통치는 법을 통해 시행되고 있기 때문에 '법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고민하게 된것[각주:13]이다.


그럼 법이란 무엇인가? 「식사」편에서 다음 내용을 통해 한비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한비에게 법이란 도량형과 같이 기준을 판단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중략) 지혜와 재능은 도를 다하더라도 남한테 전할 수 없다. 도와 법에 의존하면 모두 안전하며 지헤와 재능에 의존하면 실패가 많다. 무릇 저울대를 매달아 평형을 알고 규구(規矩)를 써서 원을 아는 것이 안전한 방법이다.[각주:14]


한비는 소국 한(韓)나라를 혼란한 정세에서 지킬 수 있는 길은 군주독재를 실현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법에 의거한 통치 기술을 연구하게 된다. 이러한 사상적 혁명은 「고분」, 「세난」 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두 편을 두국상은 순자의 영향이라고 하지만, 냉정하고 객관적인 분석의 순자와는 달리 개인적 감정을 바탕으로 주관적이고 통렬한 비판을 한다는 점에서 둘의 성격 차이가 명확하게 달라진다고 저자는 말한다. 즉, 『순자』의 이론에서 촉발되었지만 완전히 다른 전개상을 보인다는 것이다.[각주:15]


법이란 득실을 재고 곡직을 명확히 밝히는 것이며, 법이 서면 감히 페지할 수 없다. 따라서 (도를 쥔 자는) 능히 스스로 재며, 그렇게 한 뒤에 천하를 실제로 알아 미혹되지 않는다.[각주:16]



한비의 법法, 술術, 세勢


『한비자』에서는 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법은 도량형처럼 객관성이 있기 때문에 거기에 지능(智能, 지혜와 재능), 즉 자의(恣意)가 섞여들면 법의 안정성이 훼손된다", "오로지 법에 의해서만 지배해야 하며 지능, 곧 자의가 섞여서는 불가능하다".[각주:17] 이는 『관자』의 「임법(任法)」의 영향을 받아 법가의 입장을 드러내는 것이다. 특히 법에 대한 사고방식은 상앙과 신불해의 영향을 받게[각주:18] 되는데, 상앙의 변법을 통해 스스로 철저한 혁명사상을 부과함으로써 국가의 위기를 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비판함으로써 독자적인 입장을 견지하게 된다.[각주:19]


한비는 오기(吳起)와 상앙(商盎), 신불해(申不害) 등의 법술이론은 받아들여 자신의 법술이론을  '법'法, '술'術, '세'勢라는 세 가지 요소를 담아 구축하게 된다. 여기서 '법'이란 성문법을 말하며, 군주의 입장에서 이를 운용하는 것을 '술'이라 하고, 이러한 법과 술을 보완하고 성립하게 만드는 것이 '세'라는 개념이다.[각주:20] 즉 법과 술은 법학적·정치적 개념이라면 세는 역사철학적 개념이다. 저자는 한비가 신불해의 술을 중시한 한 분파, 상앙의 법을 중시한 한 분파, 신자(愼子)의 세를 중시한 한 분파를 평등한 입장이 아니라 한 단계 높은 입장에서 종합했다고 해석한다.[각주:21]


한비는 이러한 법치주의를 저해하는 요소라 다음 다섯가지를 꼽았다. 첫째 학자, 둘째 유세가, 셋째 칼을 찬 협객, 넷째 군주와 가까운 신하, 다섯째 상공업자.[각주:22] 지금 기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지만, 군부의 권력, 권력에 기생하는 무리, 시장 질서를 왜곡하는 재벌권력, 잘못된 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부역학자 등이라고 한다면 한비가 뽑은 요소가 현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한비의 법가 사상은 당시 신흥 지주계급이 점차 통치 계급으로 등장을 대표하는 사상으로 간주하지만 실상은 군주의 독재체제를 강화하는 정책을 주장한다.[각주:23] 이는 인민의 동의를 얻지 않으면 법령을 제대로 실행할 수 없다는 제(齊)나라와는 사뭇 다른 주장으로 제나라와 같이 민주주의적인 전통이 발달하지 못하였고, 진(晉)에서 갈려져 나온 이후 여러 법이 섞여 있는 당시 한(韓)나라의 특수한 상황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이러한 사상을 받아들인 진(秦)나라가 제나라외 동쪽 여러나라로 부터 강한 저항을 받게 된 원인이 된다.[각주:24]


비록 한비가 군주의 독재체제를 주장하였다고 해도 그것은 한비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 때문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노예제[각주:25]를 지지했던 것과 같다. 만일 한비가 현재를 산다면 그는 주관적이고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제도가 아닌 객관적이고 명확해 항구적인 제도를 주장했을 것이다. 그것이 한비에게는 법치주의였다. 군주도 지켜야 하는 법. 법에 대한 그의 사상은 2천년이 지난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한비자』를 알지 못한채 한비자를 설명하는 책 한권만으로 한비의 사상을 모두 다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어떤 면에서는 잘못 이해하고 있을지 모른다. 이는 후에 『한비자』를 읽고 다시한번 이 책을 읽음으로써 수정, 보완해야 할 것이다.






  1. p266 [본문으로]
  2. 사기열전1, 노자한비열전, 민음사, p85 [본문으로]
  3. p55 [본문으로]
  4. p56 [본문으로]
  5. p82 [본문으로]
  6. p129 [본문으로]
  7. p94 [본문으로]
  8. p141 [본문으로]
  9. p165 [본문으로]
  10. p165 [본문으로]
  11. 용조조容肇祖(1897~1994) 중국 민속학과 중국 민간문학의 전문가. p140 [본문으로]
  12. 양계초梁啓超(1873~1929)의 동생, p141 [본문으로]
  13. p190 [본문으로]
  14. p197 [본문으로]
  15. p212 [본문으로]
  16. p191 [본문으로]
  17. p219 [본문으로]
  18. p221 [본문으로]
  19. p231 [본문으로]
  20. p242 [본문으로]
  21. p242 [본문으로]
  22. p252 [본문으로]
  23. p254 [본문으로]
  24. p261 [본문으로]
  25.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그리스 철학자들도 선천적 노예 제도를 인정하였는데, 이는 즉 태어날 때부터 노예인 사람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위키백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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