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적인 나쁜 습관이 있다면 보고싶지 않은 일은 외면하는 습관이다. 응원하는 팀이 경기에서 이기면 관련 기사나 영상을 찾아보지만 질 경우에는 되도록 보지 않으려 한다. 기쁜 일은 머리에 계속 떠올리며 즐거워하지만, 가슴 아픈 일은 애써 모른척 한다. 위안이라면, 어쩌면 이런 습관은 나 혼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고질적인 악습이 아닐까라는 막연한 생각정도. 그렇기에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이런 말을 한게 아닐까.


사람은 누구나 모든 현실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현실만 본다.[각주:1]


한국의 근현대사도 내게는 이런 느낌이다. 못나고, 불쌍하고, 무능력해서 보기 싫은 가족. 항상 나를 부담스럽게만 하는 가족. 그러나 가족이기에 결코 버릴 수 없는 그 무엇.


만일 먼 과거였다면, 그래서 나와는 관계없는 일처럼 느껴졌다면, 그저 예전 일이겠거니 어느 한 시대 선조들의 힘들었던 시절이겠거니 하겠지만, 근대사는 그냥 옛일이 아니다. 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일이었고, 아버지의 어머니의 일, 그리고 바로 내 일이기도 하다. 그처럼 가까운 과거이기에 더 많은 자세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보고 싶지 않은 것일지 모른다.


사랑하는 자와 이별한 사람이 일상적인 삶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죽은 자를 잊어야 하고, 잊기 위해서는 애도哀悼의 기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만일 애도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으면 산자는 죽은자를 껴안고 자신을 공격한다는 것이다.[각주:2] 물론 역사와 사람은 다르다. 그러나 과거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과정이 있어야, 슬픈 과거를 더 이상 슬퍼하지 않고 바라볼 수 있을 것이고 외면하거나 공격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애도의 과정'으로 선택한 방법이 『고쳐 쓴 한국 근대사』를 읽는 것이었다.




고쳐 쓴 한국근대사

저자
강만길 지음
출판사
창작과비평사 | 2006-07-10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한국근대사 개설서 고쳐 쓴 한국근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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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강만길氏는 고려대 명예교수로 한국 근현대사의 거목으로 알려져있으며, 참여정부 시절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한국의 대표적인 진보적 역사학자로 알려져있다. 따라서 그가 쓴 『고쳐 쓴 한국 근대사』는 진보적 입장을 견지하였으리라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몰락하는 조선왕조


조선은 임진왜란에서 비록 명나라의 도움으로 일본을 물리칠 수 있었으나, 더 이상 건강한 나라가 아니었다. 어쩌면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부터 조선의 지배체제는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는데, 군역軍役제도의 문란으로부터 이를 유추해볼 수 있다.


조선왕조는 건국 초기에는 중세적 농병일치제農兵一致制로 양반계급과 천례賤隷계층이 제외된 양인良人을 근간으로 병력을 동원하는 체제를 갖추었으나, 토지 소유를 바탕으로 하지 못한 채 보인(保人, 봉족奉足[각주:3]) 몇명을 지급하는 보인제로써  불합리한 점이 많았다.[각주:4] 이는 16세기 경 인족침징隣族侵徵[각주:5]의 폐단을 낳았고, 방군수포放軍收布[각주:6]가 일반화되면서 농병일치제 군역제도 와해를 촉진하였다.


왕조 초기에 수립된 농병일치제 의무군제는 불과 1세기 만에 무너지고, 군포로써 직업적 군인을 고용하는 용병제가 실시될 수 있는 길이 열렸지만 용병제는 제대로 실시되지 못했다.[각주:7] 결국 조선은 어이없게도 정상적인 정규군(관군)이 없는 상태로 임진왜란을 맞게 되었고, 전쟁은 대부분 의병이라 불린 민병民兵이 담당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나라를 지키기 위한 근간이 되는 군제도가 문란해 변변히 나라를 지킬 수 없었기에 임진왜란이 발발한지 20일만에[각주:8] 한양이 점렴되는 수모를 겪게 되었는데, 이이(李珥)가 이미 십만양병론을 주장하였지만 실천되지 못했다.


그런데 당시 조선왕조 사회의 더욱 중요한 문제는 지배권력에 대한 민심의 이반이 심해진 점이었다.[각주:9]


당쟁(黨爭)은 조선왕조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식민사학론'이 강조했던 '파당성 높은 민족성'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각주:10] 어느 나라, 어느 민족에서나 볼 수 있었던 권력투쟁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소수의 지배계급의 정권 쟁탈전일 뿐 민중의 생활에 보탬이 되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는 것이었고, 후에 세도정치勢道政治는 농민생활을 압박했고, 정치적 기강의 문란으로 수탈이 심해져 농민층의 항거를 야기하게 되었다.


조선 중기 눈에 띄는 변화 중의 하나는 신분제 질서의 붕괴를 꼽을 수 있다. 기존 권력투쟁에서 떨어져나간 후 경제적으로 몰락하는 양반들이 많아졌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대규모 전쟁을 통해 전쟁공로, 납속, 공명첩 매입 등으로 양반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이로 인해 양반 권위가 떨어져 양반이라는 호칭마저 그 본래의 뜻이 변해 하나의 속화된 대인칭(對人稱)으로 바뀌게 된 것도 이와같은 이유 때문이다.[각주:11]


이러한 신분제 질서의 문란은 오히려 권력층들이 신분제를 더욱 확고히 하려는 반발을 낳기도 하였는데, 족보를 연구하는 학문인 보학譜學[각주:12]을 발전시켜 신분제 질서를 엄격히 하려고 하였고, 성리학의 관념주의가 심화되었다. 그러나 이는 조선 사회를 경직화함으로써 조선이 변화하고 발전하는데 장애가 되었을 뿐이다.


결국 지배층들의 폐단과 민심의 이반으로 곳곳에서 민란民亂이 발생하였다. 관서농민전쟁으로 일컬어지는 홍경래의 난, 전국 각지에서 벌어진 임술민란壬戌民亂(1862년 2월) 등 대원군 정권이 무너진 다음에도 민란이 계속되어, 임술민란 후부터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니까지 무려 40여건의 크고 작은 민란이 계속되었다.[각주:13]



자생적으로 성장하는 민중경제


조선왕조 후기로 오면서 농업경영기술이 발달하였다. 특히 이앙법移秧法과 이모작의 발달은 농민경제 향상에 큰 도움을 주었다. 조선 초기에는 직파법直播法이 대부분이었고, 조선 정부에서도 이앙법을 금지하였는데, 이앙법은 16세기 이후 각종 제언堤堰 수리시설이 확보되면서 가능하게 되어, 노동력 절감 및 생산력 증가 됨에 따라 널리 일반화되었다.[각주:14]


이러한 이앙법은 농가의 소득을 증대시켜, 자작동은 부농층으로, 소작농은 자소작농으로 성장하게 하였으나, 한편으로는 노동력이 적게 들고 광작廣作농업이 가능해져 경작지를 잃은 농민들은 상공업인구, 유민, 또는 농업노동자로 전화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또한 기존 농종법壟種法[각주:15]에서 견종법畎種法[각주:16]으로 바꿔 보리농사에서 노동력 절감과 생산력 증대를 이뤘고, 이모작도 또한 농민의 소득 증대에 큰 도움을 주었으며, 특수작물 재배를 통해 상업적 농업으로 전환 되기도 하였다. 이는 조선 왕조 후기의 영농법 발전, 도시인구의 증가, 상공업 및 외국 무역의 일정한 발전, 그리고 그 결과로서 도시의 발전에 힘입은 것이었데,[각주:17] 농지를 잃은 상당수의 농민들과 기근과 자연재해로 인한 유민들이 도시로 집중현상이 진행되면서 기존 도시인구가 증가되거나 새로운 도시들이 형성되어 간 것이다.


상업의 발달은 화페경제를 이끌었다. 금난전권禁亂廛權[각주:18]을 행사하던 특권상인들은 신해통공辛亥通共[각주:19]이라는 통공정책通共政策이 실시되면서 육의전六矣廛[각주:20] 이외에는 난전을 금할 수 없게 되었고, 이에 따라 비록 육의전은 제외되었다고 해도 도시 사상인층과 소생산자의 활동이 활발해지게 만드는 획기적인 정책이었다.[각주:21]


상업인구가 증가하고 상품화페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17세기 후반에는 상평통보常平通寶가 유통되어 확대되어갔다. 이러한 금속화폐의 유통은 상업자본의 축적을 촉진하고 수공업과 광업 등 생산부문에 침투함으로써 상업자본의 생산 지배를 어느 정도 가능하게 만들었다. 또한중세적 신분체제와 생산구조를 무너뜨리고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이 움트게 하는 기초조건을 만들어갔다.[각주:22]


수공업 분야에서는 조선 후기로 갈수록 장인등록제 붕괴와 관청수공업이 쇠퇴하고, 민간인의 상인자본이 침투하여 점차 민영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처음에는 시전 상인과 치열하게 경쟁하였으나 점차 상업자본에 의해 수공업이 지배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조선 초기 광업은 농민들을 부역동원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니 부역에 동원된 농민들이 부상을 당하는 등 피역저항이 심해 광맥이 발견되도 수령과 향리들이 숨기는 등 폐단이 많아지자 16세기에는 쌀과 포로 대답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후 설점수세제設店收稅制[각주:23]를 실시하였는데, 설점수세제 아래서 어느정도 자본주의적 경영방식이 발달하게 되었다.


이처럼 조선 중기 이후 민중 경제에서 농업, 상업, 광업 등 모두 자본주의적 발전 방향을 이루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그에 따른 유민의 발생, 부의 편중 현상 등의 부작용이 발생하였으나, 조선의 중세적 경제체제를 무너뜨리고 어느정도 새로운 경제체제로의 전환이라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다만, 국내시장에만 한정되어 산업혁명을 이룰 수 있는 단계까지 가지 못한 한계도 갖고있다.[각주:24]



희망의 싹, 실학과 인간 중심의 민중문화


두 차례의 큰 전쟁 후, 조선 사회는 신분제 질서가 문란해지면서 집권층들은 조선왕조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예학禮學을 강조하고 성리학의 관념적인 면에만 매몰되었다. 그러나 변화에 대한 내재적 요구와 외래적 요인에 따라 실학 사상이 발달하게 된다.


내재적 요구로는 첫째, 전쟁 후 통치 질서의 경직화 현상, 둘째, 조선왕조 지배원리인 성리학의 반역사성, 셋째, 조선 후기 사회의 경제적 변화와 발전, 넷째, 조선 후기의 사회계급적 변동, 다섯째, 왕조후기 진보적 사상가들의 독자적 학문 영역 발달을 들 수 있으며, 이 시기 전래된 서학西學 및 청대淸代의 학문의 외래적 요인의 영향이 실학의 발달에 영향을 주었다.[각주:25]


실학의 연구분야로는 첫째로 민족의 전통과 현실적으로 당면한 문제를 연구대상으로 삼아 조선의 역사와 문화에 많은 관심을 쏟았고, 둘째로는 현실 개혁을 위한 사회·경제 부문의 연구로 농업 경영상의 개선책, 상공업 분야의 발전 책과 신분제도의 모순성, 수취제제 중심의 행정제도 및 군사조식 개혁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각주:26]


이러한 실학이 지배층 이념을 대변하는 성리학과 구별되는 역사적 의의는, 상당한 한계성과 제약성이 있음에도 어느 정도 민족주의적 성격이 담겨 있다는 점, 일정하게 근대 지향성을 지녔다는 점, 어느 정도 피지배대중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상·이론이라는 점이다.[각주:27]


즉, 실학은 조선 후기의 역사적 모순을 정확하게 파악한 진보 성향의 지식인들에 의해 제시된 탈성리학적·근대지향적 개혁사상이라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의 존재를 인정하는 범위 안에서의 개략주의적 사상이라는 한계점을 갖고 있기 때문에 "봉건국가의 왕권 강화에 봉사한 사상"으로 평가되기도 한다.[각주:28]


17세기 이후의 문학은 전기 문학작품이 대부분 주자학적 윤리관을 강조하는 것과 달리 인간 감정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거나 사회의 부정과 비리에 대한 고발정시이 강하게 표현된 작품이 나타났으며, 주인공도 영웅에서 민중적인 인물로 전환되어갔고, 배경도 시정적市井的인 인간관계로 옮아갔다.[각주:29]


일부 양반층이 저술한 한문학에서도 변화가 나타나 사대부적 체질이 서민문학에 동화해갔으며, 많은 위항인委巷人[각주:30]도 작품을 통해 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하였다.[각주:31] 시문학詩文學 분야에서도 특수성·독자성에 대한 자각이 생기고, 신랄한 사회비평과 풍자를 담은 작품들이 창작되었고, 민요취향의 한시도 나타났다.


회화 분야에서도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 기존 양반사대부의 인격이나 정신세계, 자연에 대한 통찰을 주로 담은 문인화와 달리,  조선 후기에서는 정형화된 화풍이 선보였고, 실경산수實景山水의 독자적 작풍作風과 풍속화가 나타났다.



근대국가 수립의 실패


쇄국주의의 대원군 정책이 무너지면서 민씨정권에 의해 문호가 개방되었다. 그러나 이는 민씨정권이 진보적인 정권이거나 내부적 준비를 갖추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권력 유지를 위해 외세의 문호 개방 요구에 응할 수 없었고, 그 중에서 일본은 당시 내부 사정으로 조선에 적극적인 문호개방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결국 일본은 운양호사건(雲揚號事件, 1875)을 일으켜 마침내 조선과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 1876)을 체결하였다.[각주:32]


문호개방에 반대하는 보수 유생층은 척사위정론斥邪衛正論을 주장하여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이론적으로 뒷받침 하기도 하였는데 이들이 개화정책 및 외국과의 교역을 반대하는 이유는 서양의 공업생산품과 조선의 농업생산품을 교역하면 국내의 경제사정이 어려워진다는 점, 한번 문호를 개방하면 세계 열강의 침략이 계속되어 막을 수 없다는 점 등 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모두 들어맞았지만 이들의 주장은 주체적 근대화를 이루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조선왕조의 전제주의 정치체제와 중세적 지주·전호제[각주:33] 경제체제, 양반지배의 신분체제 및 성리학적 사상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반시대적 사상이고 운동이었다는 점이 한계였다.[각주:34]


민씨정권의 문호개방과 개화정책에 반발은 보수 유생층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구식군인의 반말로 일어난 임오군변(壬午軍變, 1882)은 청나라의 내정 간섭만 심화시켰고, 이후 청나라와의 종속관계는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의 발생하는 원인이자, 3일 만에 실패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과 청나라가 맺은 천진조약天津條約으로 일본은 조선 문제에 청나라와 동일한 파병권을 얻게 되었고, 이는 10년 후 일어난 갑오농민전쟁 때 일본 파병 구실이 되었다.[각주:35]


갑신정변이 비록 '3일 천하'로 실패하였으나 역사적 의의는 높이 평가되고 있다. 정치적인 면에서는 청나라와의 종속관계를 청산하려 했고, 대내적으로는 조선왕조의 전제주의 정치체제를 입헌군주제로 바꾸려한 정치개혁이었다. 또한 사회면에서도 문벌을 폐지하고 인민평등권을 제정하여 중세적 신분제를 청산하려 했다는 점이다.[각주:36] 그러나 경제면에서는 지주·전호제를 유지한채 국가재정 강화를 위한 지조법의 개혁만을 내세웠고, 상공업 면에서도 자본주의 체제로의 전환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시하지 못한 한계를 갖고 있었다.[각주:37] 그럼에도 갑신정변은 단계적으로나마국민주권주의를 지향한 최초의 정치개혁운동이라 할 수 있다.


갑오개혁(甲午改革, 1894)은 한반도 근대화의 중요한 기점으로 이야기 된다. 그 직접적 배경은 갑오농민군의 개혁요구와 일본의 내정개혁 강요에 따른 것이었다. 개혁의 내용으로는 정치적으로는 내각제도가 수립되어 전제군주제를 약화시키는 요소를 갖고 있으며, 경제 면에서는 화폐제도를 은본위제銀本位制로 하고 지세를 금납화, 도량형 통일 등을 포함되었다. 또한 사회적으로는 문벌과 양반·상놈의 신분제 타파, 과거제 폐지와 능력에 의한 인재 등용, 문무존비文武尊卑의 폐지, 공사노비법公私奴婢法 폐지, 과부의 재혼 허용, 연좌법 폐지, 조혼 금지 등 중요한 사회적 폐습 대부분을 타파하고자 하는 개혁정책이었다.[각주:38]


그러나 갑오개혁은 독자적으로 추진되어 자율성이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수행 주체였던 온건 시무개화파 정권 자체가 일본의 개입에 의해 성립되었고, 청나라와의 종속 관계 청산에 적극적인 급진 개화파들과 비교해 훨씬 소극적이였다. 그리고 급진 변법개화파들이 대체로 군민동치君民同治, 즉 입헌군주제를 지향하는 개혁관을 가진데 비해 온건 시무개화파들은 이를 시기상조라고 보고 군주의 전제권專制權을 견제하는 데 머물렀다는 한계를 갖고 있다. 결국 조선왕조적 지배체제에 대한 근본적 개혁 요구에 따른 개혁임에도 불구하고 침략 목적을 가진 일본의 힘의 작용으로 근대 민족국가 수립으로 연결되는 개혁은 되지 못하고, 오히려 청일전쟁에 이긴 일본의 한반도 침략을 본격화하는 데 도움을 주는 개혁의 성격이 강해졌다.[각주:39]



일본의 침탈 및 亡國으로..


일본의 조선 침탈은 단계적으로 시행되었다.


제1단계는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1904.2.23)의 체결이었다. 영국[각주:40]과 미국[각주:41]으로부터 한국 지배의 인정과 러일전쟁 비용을 제공받은 일본은 국외중립局外中立을 선포했음에도 대한제국에 군대를 출동시켜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였다. 의정서에는 "대한제국 정부는 대일본제국 정부를 확신하고 시설의 개선에 관한 충고를 받아들인다"라는 조항을 제일 먼저 넣어 보호국화하는 기틀을 마련했다.[각주:42]


그리고 같은 해 '한국정부에 대해 그들이 추천하는 재정고문·외교고문의 채용과 중요한 외교안건에 대한 협의를 강요'한 제1차 한일협약(1904.8.22)을 체결함으로써 식민지화 제2단계를 구축했다.[각주:43]


러일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일본은 영국과 제2차 영일동맹(1905.8.12)을, 이미 태프트·카쯔라 밀약을 맺은 미국의 중재로 러시아와 포츠머스 조약(1905.9.5)을 맺음으로써 일본의 한국 보호국화 계획을 국제적으로 승인을 받은 후, 5개 조문으로 된 '보호조약', 즉 한일협상조약(韓日協商條約, 1905.11.17)을 맺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완전히 박탈하고, 통감統監을 둠으로써 식민지화는 제3단계로 접어들었다.[각주:44]


이러한 보호조약이 체결된 후 한국 황실은 강제로 체결되었음을 외국에 알리려는 노력을 했고, 비밀리에 사절을 보내기도 하였으나,[각주:45] 일본은 물론 영국 등의 방해로 실패하고 오히려 일본의 강요에 의해 고종(高宗, 1864~1907 재위)이 퇴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대한제국은 '한국 병합에 관한 조약'이 체결되고(1910.8.22) 공포됨으로써(8.29), 일본의 완전한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민족의 힘, 민족 운동


조선의 중세적 통치체제의 모순에 저항하는 민란은 꾸준히 일어났으나 국지성과 분산성을 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우선 농민층의 정치·사회적 의식수준 자체가 이 시기의 정치·경제·사회적 모순을 구조적이고 체제적인 모순으로 파악하는 단계로 나아가지 못했고, 이를 확대하거나 혁명성을 불어넣을 만큼 정치의식이나 지도력을 갖춘 정치적 지도층이 아직 형성되지 못했기 때문이다.[각주:46]


개항이후에도 농민층과 척사위장파, 개화파 사이에는 이해관계가 달랐다. 반외세, 반봉건을 내세우는 농민층에게 척사위정파는 반봉건 논리는 함께할 수 없었고, 개화파는 반외세 논리를 함께 할 수 없었다.


갑오농민전의 주된 배경 또는 원인으로는, 문호개방 이후 자본주의의 침략으로 인한 농민경제의 타격, 외세에 대한 집권층의 타협과 굴복, 국제적 분쟁 및 제도 개혁에 따른 정부 재정의 곤란과 농민 부담의 과중, 지배층의 분열과 농심생활을 외면한 정쟁의 연속, 농촌지식인의 경제적 몰락과 그 정치의식 및 지도려의 향상, 외세 침략으로 인한 농민세계의 위기의식 팽배와 그 정치·사회의식의 성장, 자본제 상품의 침투와 봉건 지배계급의 수탈로 몰락을 강요당하던 소상품 생산자 및 소상인층의 농민층과의 연대 등을 들 수 있다.[각주:47]


제1단계 고부민란(1892.2), 제2단계 전주입성(1892.4), 제3단계(1894..5.8) 전주점령, 제4단계(1894.10.12) 제2차 농민전쟁기로 구분하는 갑오농민전쟁은 조선왕조 정부는 '동학란東學亂'이라고 불러 종교단체가 일으킨 반란으로 성격지으려 했으나 뒷날의 역사학은 동학교단의 지도에 농민이 참가해 일으킨 전쟁 내지 혁명으로, 동학교도만의 반란으로 보지 않고, 동학교단보다는 농민 지도층의 주도로 폭발한 농민전쟁으로 이해하게 되었다.[각주:48]


이 전쟁의 성격을 두 가지로 요약하면, 반봉건·반외세 투쟁이었다. 최초로 기도된 부르주아적 개혁운동인 갑신정변과 비교해보면 지주적 토지 소유를 인정한 갑신정변 개혁안에 비해 '토지의 평균 분작'과 노비문서의 소각을 요구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높은 혁명성에도 불구하고 개혁 대상이 중앙정부의 '권귀權貴'에 한정되는 등 왕조와 왕권까지 부정하지 못한 농민국 지도부의 정치의식 한계성도 동시에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 한계성에도 불구하고 조선 정부는 이후 갑오개혁을 진행할 수 밖에 없었다. 다만 농민군의 실패로 개혁을 농민층이 아닌 온건한 시무개화파가 주도함으로써 타율성, 타협성, 개량성을 높였고 결국 근대 민족국가 형성에 실패하고 식민지화의 길을 걷게 되는 중요한 갈림길이 되었다. 그리고 잔여세력은 봉건 유생 주도의 초기 의병전쟁이나 대한제국 시기의 각종 민란이나 영학당英學黨, 활빈당活貧黨 등의 반외세·반봉건 민중운동 활동으로 이어졌다.


독립협회 운동은 갑신정변과 갑오농민전쟁을 경험하고, 문호개방 후 20여년간의 부르주아적 사회계층의 성장을 바탕으로 나타난 운동이다.[각주:49]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와 함께 적극적이고 대중적인 정치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실패의 원인으로 독립협회 상부 지도층과 일반회원 사이의 시국관 또는 운동관의 차이점이 지적되고 있다.


독립협회가 지향한 군권은 '군림은 하나 통치하지 않는' 존재라기보다 '전제황권'적이고 다반 보수 정치세력을 진보 정치세력이 지배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또한 독립협회 회원 이외의 국민의 참정 능력을 부인함으로써 민중관에 한계를 갖고 있었다.[각주:50]


갑신정변이 일부 귀족세력이 청나라로부터의 국가적 독립과 입헌군주제를 지향한 정변이었다면, 독립협회 운동은 사회 각계각층으로 확대된 진보적 정치세력·사회세력이 결집된 부르주아적 국권수호·민권신장운동이었으며, 입헌군주제 지향 운동이었다. 애국계몽운동은 이끌어나간 단체와 참가 인원 수가 크게 증가하여 독립협회 때보다 훨씬 확대되었다.[각주:51]


애국계몽운동 주체들은 국권 상실의 원인을 국민대중의 우매함이라고 생각하고 대중 계몽을 통한 실력 양성이 국권 회복의 길로 보고 언론·교육·출판 및 국학 연구 등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이들은 대중은 계몽의 대상일 뿐 운동의 동반자로 생각하지 않았다. 때로는 지식인 층이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논리를 받아들여 외세 침략 자체에 대한 저항인식이 철저하지 못했고, 제국주의 인식, 부르주아 운동으로서 갖춰야 할 전투성·혁명성 등을 갖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다. 이 때문에 한일합방에 이르기까지 무장투쟁으로서의 의병전쟁과 결합하지 못한 채 계몽운동에 한정되었을 뿐이었다.[각주:52]


또한 애국계몽운동의 주류는 공화제보다는 입헌군주제, 국민주권론보다는 군주주권론에 가까워 혁명성이 결여되어 있었고, 비전투성, 비혁명성는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는 중요한 원인의 하나게 되었다.






고쳐 쓴 한국 근대사』는 400쪽이 넘지 않은 분량이지만, 조선 중기부터 일본에 국권이 침탈될때까지의 정치, 사회, 경제적인 면을 지배층과 민중에 대해 모두 기술되어 있어 당시 사회 여러 방면의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물론 지면상 한계로 인해 사건의 세세한 부분을 모두 다루지 못해 아쉬울때가 있는데 그것은 책의 잘못이 아니다. 굵직한 사건 하나만 다루어도 한권의 책이 넘을텐데 그것을 어찌 이 안에 다 담을 수 있겠는가. 더 필요한 부분은 다른 자료를 찾아보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진보적인 역사학자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내 느낌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지배층과 정치체제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발전하는 민중의 힘을 책 속에서 느낄 수 있었다. 지배층의 부패와 무능함에도 농업과 상업 등 민중의 생활은 계속 발전하였고, 통치자가 그 역할을 제대로 할때는 발전은 또 다른 발전을 위한 토대가 되었다.


일본의 침탈에 대항해서도 조선(대한제국) 정부는 여전히 무능력했고, 기득권층은 권력 유지에 급급했다. 개혁과 발전의 노력이 완전히 없었다고 할 수 없지만, 대부분 선택할 수 없는 지경에 몰려서야 행동에 옮기곤 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나라를 빼았기는 결과를 낳았다. 반면 민중은 계속 움직였다. 민란을 통해, 갑오농민전쟁과 만민공동회를 통해 개혁의 의지를 보였고,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해 신지식을 배우며서 새 시대를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을 강대국의 욕심이 좌절시켰다. 부르주아 층에서도 갑신정변, 독립협회 등을 통해 개혁을 하려는 욕구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민중과 연결되지 못하는 개혁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배워게 되었다.


민중과 부르주아의 개혁이 모두 내부적 또는 시대적 한계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 개혁의 의지는 독립운동으로 이어졌고, (비록 온전한 스스로의 힘으로 되찾은 것은 아니지만) 끝내 국가를 되찾는 원동력이 되었다. 비록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은 그 자체의 무능과 모순으로 역사에서 사라지는 것이 당연했을지라도 한반도의 민중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책을 읽으면서 느끼게 되었다. 한반도의 민중은 역사에 살아남은 다른 민중처럼 개혁과 발전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민중의 개혁 의지를 읽으면서,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가 떠올랐다. 책에서 저자는 각 문명의 발전 차이를 지리적 위치에 따라 설명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설명하기 위한 도구일뿐 궁극적으로는 《진보》를 어떻게 하느냐가 각 문명의 생존과 발전의 차이를 가져온 것이라 이해했다.


마찬가지로 대한제국은 진보의 의지가 없었다. 그러나 민중은 진보의 의지가 강했다. 그 결과 대한제국은 사라졌지만, 그 민중은 지금도 여전히 세계 속에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나라가 사라지고, 민족도 사라지고, 인류가 사라질 날이 올지 모른다. 그러나 그날이 올때까지 우리는 "《어떻게 진보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항상 무능하고, 애처롭고, 못난 가족, 그러나 결코 미워할 수도 버릴 수도 없는 가족과 같은 한국의 근현대사를,
고쳐 쓴 한국 근대사』를 통해 더 이상 외면하지 않고 똑바로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어쩌면 슬픔을 잊기 위한 애도에 알맞는 책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끝.






  1. Men are nearly always willing to believe what they wish. Nearly always people believe willingly that which they wish. 출처: http://en.wikiquote.org/wiki/Julius_Caesar [본문으로]
  2. 지그문트 프로이드, <애도와 우울증>, http://goo.gl/pOIHl [본문으로]
  3. 봉족제는 고려의 양호제(養戶制)에서 유래한다. 고려에서는 3가 1호로 구성되는 1군호(軍戶)에 족정(足丁)이라는 17결의 토지를 군인전으로 지급했다. 3가는 각각 군정 1명씩을 내어 1군호에 3명의 군정이 나오는데, 그중에서 입역하는 자는 정정 1명뿐이고 2명은 상번한 정정의 양호(養戶)가 되어 군인전을 경작했다. 조선의 봉족제는 토지지급 없이 토지를 보유한 가호(家戶)를 대상으로 편호(編戶)한 것이다. 출처(링크) [본문으로]
  4. p35 [본문으로]
  5. 인징은 부역자를 대신하여 이웃에게 역을 지우는 세금이며, 족징은 그것을 친족에게 부과하는 것을 말함. [네이버 지식백과] 인족 [隣族]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3.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본문으로]
  6. 지방의 영(營) · 진(鎭)에서 복무하는 군사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그 대가로 베를 받아들인 제도 [네이버 지식백과] 방군수포 [放軍收布] (두산백과) [본문으로]
  7. p36 [본문으로]
  8. 1592년 음력 4월 13일 침공하여, 음력 5월 2일 일본군 제1군과 제2군은 개전한 지 20일 만에 충주·여주·양근 등을 거쳐 한양을 점령하였다. (출처:위키백과) [본문으로]
  9. p67 [본문으로]
  10. p23 [본문으로]
  11. p60 [본문으로]
  12. 족보를 연구하는 학문.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주요 씨족들과 그 주요 계파들의 내력이나 주요 인물들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뜻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보학 [譜學] (한국고중세사사전, 2007.3.30, 가람기획) [본문으로]
  13. p65 [본문으로]
  14. p96 [본문으로]
  15. 밭고랑[畎]과 밭이랑[畝]의 구분이 없는 평평한 토지인 만전(縵田)에 씨앗을 고루 뿌리는 만파(漫播)를 한 다음 흙을 일구어 씨앗을 덮는 기토복종(起土覆種)을 통하여 밭두둑[壟]을 만드는 경작법 [네이버 지식백과] 농종법 [壟種法] (두산백과) [본문으로]
  16. 밭이랑과 밭고랑을 내고, 파종을 밭고랑에 하도록 한 방법 [네이버 지식백과] 견종법 [畎種法]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견종법 [畎種法] (두산백과) [본문으로]
  17. p102 [본문으로]
  18. 조선 후기 육의전(六矣廛)과 시전상인(市廛商人)이 상권을 독점하기 위해 정부와 결탁하여 난전을 금지할 수 있었던 권리 [네이버 지식백과] 금난전권 [禁亂廛權] (두산백과) [본문으로]
  19. 신해통공(辛亥通共)은 조선 후기인 1791년(정조 15년) 시전의 국역은 존속하되 그들의 도고 상업(금난전권)은 금지시킨 조처이다. 통공정책 가운데 하나이다. (출처:위키백과) [본문으로]
  20. 조선시대 서울 종로에 자리 잡고 있던 여섯 가지 종류의 어용상점(御用商店)으로, 명주,종이,어물,모시,비단,무명을 팔며 흔히 육의전(六矣廛)이라 불렸다. (출처:위키백과) [본문으로]
  21. p114 [본문으로]
  22. p135 [본문으로]
  23. 설점수세제는 영세 민간자본이라도 광산개발에 참여시키기 위해 정부가 광물산지에 제련장과 부대시설을 마련해주고, 민간자본이 노동자를 마음대로 고용할 수 있게 해주되 광물의 일부를 세금으로 바치게 한 제도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광업의 민영화 과정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상인과 상업활동), 2012, 한국콘텐츠진흥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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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 토지 소유주인 지주와 이를 임대받아 경작하는 전호(田戶)가 있는 형식의 토지 소유 형태를 지주전호제라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지주전호제 [地主田戶制] (두산백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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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 영일 동맹(英日同盟)은 1902년 1월 30일 러시아의 남하에 대비하여 이해를 함께하던 영국(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과 일본(일본 제국) 양국이 체결한 군사 동맹이다. 출처:위키백과 http://goo.gl/HMMPW [본문으로]
  41. 태프트-가쓰라 조약(Taft-Katsura Agreement) [본문으로]
  42. p254 [본문으로]
  43. p25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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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 p266 [본문으로]
  47. p26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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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9. p280 [본문으로]
  50. p282 [본문으로]
  51. p293 [본문으로]
  52. p29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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